고려와 배려.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닮은 것 같지만 어딘가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은 으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목적어가 놓이는 순간, 다시 말해 어떤 것을 고려하고, 누구를 배려하는지 등의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단어 사이에 미세한 간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간극을 따라가다 보면 혹시 다른 마음을 담겨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고요.
두 단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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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에 담긴 시선 : '배려'와 '고려'의 사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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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 l 예전에 포용적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국문학과 교수님들도 만나고 다양한 장애 당사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그때 되게 사소해 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시혜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는 걸 이야기하면서, 저도 다시 한번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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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혜(施惠):
‘은혜를 베풀어 남을 도와줌’이라는 뜻으로,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려주는 행위 자체를 뜻한다. 단어에 자연스럽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위아래 관계가 암묵적으로 깔려있다는 느낌이 있어서 편향적인 뉘앙스를 가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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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 l 예를 들어 ‘장애인을 배려한다’라는 표현이요. 이게 좋은 의미로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20% 정도는 시혜적인 뉘앙스가 섞여 있다고 느꼈어요. 마치 장애인을 우리가 더 보살펴야 하고, 특별히 더 챙겨줘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는 거죠. ‘임산부 배려석’이라고 부르잖아요. 임산부는 상황상 보호받아야 한다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 단어 자체에서 시혜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데, ‘장애인을 향한 배려’라는 표현은 조금 다르게 다가오죠.
그 이후로 저는 ‘배려’라는 단어를 뉴스레터나 공식 문서에서도 잘 쓰지 않게 됐어요. 비슷하게 ‘~을 위한’이라는 표현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하고요.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디자인’ 같은 말도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안에도 10% 정도는 시혜적 시선을 담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가급적 ‘고려’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고려’는 훨씬 객관적이고, 상대를 특별히 구분 짓지 않는 느낌을 주거든요.
'배려'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considerate' 정도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영어 표현에도 이런 경우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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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l 'consider'라는 단어는 괜찮게 들리는 것 같아요. 어느 쪽이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느낌은 있지만, 어떤 우위 관계나 시혜적 태도는 담겨있지 않은 느낌이에요. 'Be considerate'라는 표현도 자주 쓰는데, 역시 긍정적이고 부드럽게 들릴 뿐 특별히 부정적인 뉘앙스로는 다가오지 않고요.
사실 'Design for disabled people' 같은 표현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예요. 이게 '비포용적(non-inclusive)'이라고 따로 지적하는 경우는 별로 못 봤어요. 아마도 이런 부분은 한국어 특유의 언어 감수성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선이나 관계 설정이 미묘하게 반영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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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 l 맞아요. 실제로 장애인 당사자분들에게도 물어봤는데, '고려 > 위한 > 배려' 순으로 덜 부담스럽다고 하시더라고요. 배려라는 단어는 가능하면 안 써줬으면 좋겠다고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언어 감수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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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l ‘은혜’, ‘Grace’ 두 단어를 떠올려보면 언어 간 차이를 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영국이나 미국 모두 기독교 기반 문화라서 'Grace Period' 같은 표현을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많이 쓰거든요. 그런데 이런 단어를 사용할 때, 사람들이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베푸는 것’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냥 '긍정적인 혜택'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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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찾아보니 두 단어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다. 의미는 같아도 언어에서 느껴지는 인식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국/동아시아권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인해 ‘은혜’라는 단어에 수직적인 관계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윗 사람이 아랫사람을 도와주거나 베푸는 의미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적 문화가 기반을 이루는 영미권에서는 Grace를 무조건 적인 사랑이나 관대함으로 느낀다. 신은 인간이 부족하고 죄를 지었더라고 조건 없이 베푼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누군가가 누군가를 돕는 행위' 또는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행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표면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지닌 두 단어가 미세하게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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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ㅣ저는 독일에서 5년 정도 거주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요. 독일에서는 각 개인은 모두 다르지만 고유하다는 이해 방식이 자연스럽게 퍼져 있어서, 장애를 가진 분들을 바라볼 때도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기보다는 나와 다른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어요.
이런 인식 때문인지, 특정 상황에서 나는 도움을 주는 존재 혹은 나는 도움을 받는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더라고요.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나는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고요. 그래서 그런지 독일에서는 '배려'라는 단어조차 특별히 시혜적인 의미 없이 사용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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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ㅣ말씀 들으면서 느꼈어요. 결국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사회의 기본 감수성을 결정짓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다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누군가는 불편하게 느끼기도 하고요. 이 차이는 일상 속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드러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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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ㅣ맞아요. 저는 요즘 딸아이가 학교 다니면서 그런 걸 더 자주 느끼는데요. 오늘 아침에도 반티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티셔츠에 '나보다 우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아, 한국 학교구나' 하고 바로 느꼈어요.
서구권에서는 개인주의적 문화가 더 강해서, 이런 집단 중심의 메시지는 잘 보이지 않거든요. 문화적 배경이 다르면, 다름을 바라보는 기본값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차이가 언어에도 고스란히 배어드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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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차원이론>, 문화 심리학자 홉스테드 어느 사회의 문화가 회 구성원의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과, 가치관과 행동의 연관성을 요인분석으로 구조를 통하여 설명하는 이론. 이론에 따르면 문화는 1)권력거리, 2)개인주의/집단주의, 3)남성주의/여성주의, 4)불확실 회피성향, 5)장기지향성 등의 다섯 가지 차원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75개 국가와 지역에서 이 차원들을 0부터 100까지의 척도로 측정하였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은 나라로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이 있고, 집단주의 성향이 높은 나라로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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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ㅣ두 분 이야기 들으면서 저도 문화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주의, 개인주의 개념이 떠올랐어요. 한국은 여전히 집단주의 색깔이 강한 편인데, 이 문화적 토양 속에서는 다름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특별히 구분 지으려는 시선이 생기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장애를 바라볼 때도 ‘돕는다’, ‘배려한다’는 표현이 쉽게 등장하고, 그 안에 무의식적인 위계가 담기게 되는 거겠죠.
동양에서는 장애를 ‘가문의 수치’로, 서양에서는 ‘개인의 죄’라고 표현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결국 다름을 바라보는 기본값이 다르면, 언어 감수성의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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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ㅣ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 감수성'이라는 부분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코스메틱 관련 리서치를 하다 보니 미국에서도 'normal skin'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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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cail, <Comprehensive Guide to Understanding Your Skin Typ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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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ㅣ미국에서 스킨 타입을 구분하는 범주가 5단계 정도 되는데요. normal, dry(건성), oily(지성), combination(복합성), 그리고 sensitive(민감성) 이렇게 구분하더라고요. 이 중 normal skin은 '문제없는 피부'를 뜻하는데, 이 표현이 오히려 다른 피부 타입을 비정상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Healthy skin'이나 'Balanced skin' 같은 표현을 쓰자고 권장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문화적 차이’라는 변수를 제거하고도, ‘언어 감수성’ 영역은 어떤 문화권에서든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접근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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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 ㅣ 이번에 부산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열 개의 눈>이라는 전시를 준비했었는데요. 이번에 전시 준비하면서 장애인분들을 직접 만나 뵙게 됐어요.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비장애인 시선에서 보기 때문에 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라고요. 사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항상 '배려 받아야 하는 존재',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만 보여야 할까, 그런 것에 대한 불편함을 말씀하시더라고요.
우리는 그분들의 입장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표현 하나하나에 더 조심해야겠다는 걸 느꼈고요. 타인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하더라도 결국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언어 감수성’도 공감 능력에서 시작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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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ㅣ맞아요. 언어 감수성도 결국 공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해요. 제가 UX 라이팅을 할 때도 '장애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고, 대신 '방해물'이라고 하자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장애물'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잖아요.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느끼게 만드니까요. '방해물'은 좀 더 중립적이고, 상대방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서 공감적인 접근이 될 수 있죠.
언어 하나하나가 결국 공감의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작은 단어도 신경 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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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ㅣ정말 그렇네요. 그런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어요. '장애물'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을 고정된, 넘지 못할 무언가로 정의하는 느낌을 줄 수 있겠어요. '방해물'은 그 사람을 그 상황 속에서 겪고 있는 불편함으로 바라보는 거니까요. 시혜적이거나 의학적인 관점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단어들은 더욱 신중하게 선택하는 연습을 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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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ㅣ정확히 말하셨네요. 결국, 언어 하나하나가 우리가 어떻게 상대방을 대하는지, 그리고 그 사람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보여주는 거네요. 작은 단어들이지만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그런 세심한 신경을 쓰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감과 배려가 언어 안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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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ㅣ임슬기, 미션잇 콘텐츠 에디터
참여ㅣ김병수, 미션잇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예진, 미션잇 디자인 디렉터
Andy Kim, 미션잇 Global 리서쳐
박예지, 미션잇 UX리서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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