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연결과 심리적 안정을 위한 공간
창문 밖으로 놀이터가 보인다. 화창한 날씨, 햇살이 따뜻하게 퍼지는 오후.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노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온다. 활짝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한켠씩 더 무거워진다. 저 아이들 속에 내 아이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저 이 창 너머에서만 바라본다.우리 아이도 나가서 놀고 싶다. 그 맑은 눈빛을 보면 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시간을 미루고, 사람들이 덜 모일 때를 기다린다. 아이들이 한창 모여 있을 때 나가기가 두렵다.
2021년 어느 날 우연히 장애 아동 부모님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아이가 있는 부모인데, 만약 나라면 기분이 어땠을까? 사실 나조차도 장애 아동의 현실과 놀이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대중적으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놀이와 공간 디자인'은 반드시 수면 위로 떠올려야할 주제였다. 그렇게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3호<놀이>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150여 명의 장애 아동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20번 이상의 1:1 인터뷰와 그룹 인터뷰, 그리고 실제 놀이터 관찰 조사를 통해 당사자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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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거주하는 토바 레드모는 사지 마비와 뇌성 마비를 가진 에일린과 비장애인 동생 엘리스를 함께 기르고 있다. 토바는 에일린이 동생과 함께 지내며 참을성을 배우고 소통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엘리스는 타인을 결코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고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이 함께하는 힘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은 알루미늄 호일로 함께 노는 모습. ©Tova Red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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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놀이터에서 장애 아동들을 볼 수 없었을까? 바깥 활동에 어떤 제약이 있을까? 조사 결과,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 병원이나 클리닉 방문 때문에 시간이 부족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 아동의 경우 이동 자체가 어려워 외부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동과, 부모님이 놀이를 위해 방문한 외부 공간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주변의 시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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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아이를 그네에 태워봤는데 아이가 입꼬리를 삐죽했어요. 그네가 좋았나봐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엄청 유심히 쳐다보고 불쌍해하는 눈빛에 제가 참 지치더라고요.
장애 아동 부모님들이 가장 힘들어한 점은 다른 부모들이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이나 아이를 피하려는 행동이었다. 물리적 장벽보다도 심리적 장벽이 놀이터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데 가장 큰 방해 요소인 것이다. 미국 포틀랜드의 인클루시브 놀이터 비영리 재단인 하퍼스플레이그라운드(Harper's Playground)의 대표 코디 골드버그는 놀이 공간이 물리적인 초대(physically inviting)뿐만 아니라 사회적 초대(socially inviting)와 정서적 초대(emotionally inviting)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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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주, 밴쿠버 시에 설계한 하퍼스 플레이그라운드 ©Harpers Playgrou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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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초대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의미한다.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터는 단순히 고정된 놀이 기구들이 진열된 곳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연결감’을 형성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또한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초대’가 가능한 공간이다.
요새 키즈 카페를 가보면 현란한 놀이 기구들이 즐비하다. 아이들도 놀이 기구를 즐기기 위해 간다. 그런데 코디와의 대화에서 인상 깊었던 말은 놀이 공간에서 지향해야 할 것이 ‘사용자와 사물의 교류’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퍼스 플레이그라운드는 공간을 빽빽하게 채우지 않는다. ‘진짜 좋은 디자인은 공간에 넣은 것이 아닌 그들 사이의 빈 곳에서 만들어진다.’라는 말처럼 아이들끼리 서로 놀고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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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라는 가치를 공간에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 힌트를 데프스페이스(DeafSpace) 디자인에서 찾았다. 데프스페이스는 말 그대로 농인, 즉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고려한 공간이다. 여러 명이 모이는 공간에서 수어를 통해 소통하려면 상대방의 얼굴과 동작을 정확히 마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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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스페이스 공간과 근접성proximity의 원리. 상호 간에 서로 마주볼 수 있게 된다면 수어 동작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MSV4<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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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스플레이그라운드가 재설계 하기 전의 놀이터 디자인 ©Freeth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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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설계된 놀이터 디자인은 데프스페이스처럼 서로를 더 잘 확인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놀이 기구가 공원 전체에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는 아이들도 충분히 다닐 수 있도록 공간의 여백을 강조하며 설계되었다. ©Free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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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대화를 나누는 테이블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수어로 소통할 수 있도록 원형 테이블을 선호한다. 원형 테이블에서는 몸을 완전히 옆으로 돌리지 않고도 수어로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한 데프스페이스의 첫 번째 원칙인 ‘공간과 근접성 원리’는 신체를 통한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중시했다. 그래서 강의실 좌석을 둥글게 배치하거나, 극장처럼 좌석을 계단식으로 배열하여 수어 동작이 명확히 보일 수 있도록 설계한다. 이 원리가 하퍼스플레이그라운드의 놀이터에도 적용되어 있다.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언덕 위에 둥글게 배치된 벤치가 있다. 이 벤치 덕분에, 아이들과 부모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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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농인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는 이처럼 사람들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데프스페이스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요즘 지하철이나 길거리를 다니면, 핸드폰만 보며 고개를 약 30도 아래로 숙이는 자세가 사람들 사이에 보편화됐다. 그러나 데프스페이스는 비언어적 소통을 위해 서로 마주 보고, 몸을 서로에게 향해야 한다. 농, 난청인을 위한 미국 겔러댓 대학교의 6번가 보행로 프로젝트에서는 이러한 소통을 위해 공간 안에서도 디테일을 더했다. 예를 들면 잠깐 텀블러나, 핸드폰을 내려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스툴과 받침대를 보행공간에 마련한 것이다. 리처드 도허티가 독일 브라운슈바이크braunswick 지역의 장애인 축제를 위해 디자인한 벤치도 흥미롭다. 수어를 할 때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가방이나 커피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벤치를 결합한 디자인이다. 덕분에 농인도 물건을 내려놓고 수어를 쓸 수 있지만, 비장애인도 짐을 올려놓고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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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과 결합하여 넓게 디자인된 벤치는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잠깐 핸드폰이나 물건을 올려놓고, 수어를 쓸 수 있도록 고안됐다. 하지만 비장애인에게도 유용하다. ©Richard Dougher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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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측에 보이는 파빌리온 역시 서로가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둥근 형상을 가지고 있다. ©Richard Dougher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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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놀이터를 얼굴을 잘 볼 수 있게 디자인한다고 해서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 간에 깊은 교류가 이루어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실제 장애, 비장애 아동이 함께 어우러져서 놀도록 기획한 <모두를 위한 놀이> 전시에서 며칠간 관찰했을 때, 일부 아이들은 함께 상호작용하기도 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혼자 놀기도 했다.
하지만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서로를 더 잘 볼 수 있고,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면, 놀이터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동생을 둔 비장애 아동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비록 대단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열린 마음이 싹틀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데프스페이스의 공간 가이드 원칙은 농인과 난청인을 위한 공간 설계를 넘어 아니라, 놀이 공간에서 대면 소통과 사람들 간의 교류라는 중요한 가치를 구현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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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미션잇 대표로, 장애인과 고연령층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용자 경험에 대해 연구한다. 2021년부터 장애인 관찰 조사와 전문가 인터뷰에 기반한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 장애인 이동, 발달장애 아동의 놀이, 개발도상국 안전, 시니어의 디지털 접근성 등과 같은 현대 사회 이슈를 디자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런던에서 사회적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을 공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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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미션잇은 장애인, 고연령층 등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용자 경험을 연구하는 디자인·콘텐츠 기업으로, 포용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위한 깊이 있는 전략을 만듭니다. MSV는 Meet Social Value의 약자로 콘텐츠의 선한 영향력을 지향하는 미션잇의 브랜드입니다. MSV 뉴스레터는 포용적 사회를 지향하는 2,000명이 넘는 독자분들이 구독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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