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적 디지털 기술이 지향해야 할 중요한 원리 중 첫 번째는 사용자의 ‘독립성’이다. 시각장애인 부부의 육아 이야기
작년에 자녀를 기르고 있는 전맹 시각장애인 부부를 만났다. 잠깐, 전맹 시각장애인 부부인데 어떻게 아이를 기를 수 있지? 비장애인 부모라면 상상이 잘 안 갈 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려면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열을 체크하고, 공부를 가르치는 등 정말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육아의 일정 부분은 활동 보조인이 보조를 했지만 주말이나 저녁 육아는 온전하게 이들의 몫이었다.
이들이 유용하게 사용한 것은 음성 체온계였다. 보통 체온계는 음성으로 체온을 알려주지 않는다. 시각적으로 체온을 숫자로만 표시한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 시각장애인에게 정보를 청각으로 알려주는 도구는 상당히 유용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밥을 떠먹이고, 울면 달려가 달래기도 하며 온 몸으로 길러낸 이 아이들은 지금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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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체온계는 시각적으로 정보를 알려주지만, 한가지 감각 뿐 아니라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제공한다면 더 많은 사용자들이 쓸 수 있다. © Mockup Graph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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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한 가지 아쉬워한 것은 교육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이가 자라면 호기심도 불쑥 자란다. 뭐든 물어본다. “이건 뭐야?”, “이건 왜 이래?” 손가락을 짚어 화면이나 책을 가르키는데, 그때마다 이들은 안타까웠다.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를 가진 뒤 약 15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설리번 플러스’나 ‘Seeing AI’ 같은 광학 문자 인식(OCR) 기능이 탑재된 애플리케이션으로 이미지를 촬영해 인식하고, 더 자세한 정보를 ChatGPT에게 물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요새 ChatGPT 보이스 모듈은 음성 소통도 가능하니 “이 공룡의 이름과 특징을 설명해줘” 이렇게 활용하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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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번 플러스, GPT4o의 동일 사진에 대한 묘사. 작년 10월에 OCR 기능을 놓고 설리번 플러스와 Seeing Ai를 비교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동일 사진을 가지고 설리번 플러스와 GPT를 테스트해보았다. GPTo 버전의 정보 전달 능력이 엄청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요새 자녀를 양육하는 시각장애인 부부라면 이런 기술을 활용해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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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성’과 ‘정신 모형Mental Model’
포용적 디지털 기술이 지향해야 할 중요한 원리 중 첫 번째는 사용자의 ‘독립성’이다. 누구나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행동하고 싶어 한다. 앞서 예시로 든 시각장애인 부부의 사례에서 이들이 부모로서 어떤 지점이 가장 답답했을까? “내 자녀는 내가 기르고 싶다”라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최대한 하고 싶은 그 마음을 부모라면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자가 독립적으로 사용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를 위한 기술’의 핵심적인 역할이다. 시각장애인 스크린 리더Screen Reader나 농, 난청인을 위한 실시간 텍스트 변환 기술Speech to Text, 손 사용이 불편한 사용자를 고려한 음성인식이나 안구인식 을 통한 기기제어 등이 이런 독립성의 원리에서 출발한다. 흥미로운 점은 주로 사용하는 감각을 치환했다는 점이다. 시각 정보를 청각 정보로, 또 청각정보를 시각정보로 바꿔 전달함으로써 사용자의 선택권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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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정신 모형이다. 오랜 기간 쌓아온 고연령층의 경험과 지식은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이전 시대의 기계와 아날로그 기기에는 탐색 기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화기,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기기들은 버튼이 모두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고, 따라서 직접적으로 버튼을 누르거나 손잡이를 돌리는 등 단순한 동작으로 원하는 채널과 주파수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이전에 경험했던 방식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 인터페이스에 적응해야만 한다. 덧붙여서 고연령 저소득층은 스마트폰이 없거나 집에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어 디지털 중심의 사회적 연결망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정신모형 : 사용가 쌓아온 경험에 기반한 생각의 틀. 공공디자인 소식지에 정신 모형에 대한 설명이 잘못 기입되어 있어 다시 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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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이라는 책임과 ‘퍼스트 터치First Touch’
필자가 발행을 준비하고 있는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도서관 : 포용적 도서관의 요소들> 제작을 위해 여러 인터뷰를 진행하며 공공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특수 학급을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지역 사회에서 아무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몇 개나 될까요? 공공도서관은 아이들이 언제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조언을 주셨다. 공공성을 지닌 공간이란 곧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닌 공간이자, 모두에게 열린 ‘환대’하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누구든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환대’는 첫 시작에서 강하게 전달된다. 그래서 처음 맞닥뜨리는 접점이 매우 중요하다.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출입구, 온라인 공간에서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첫 페이지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오스크와 같은 물리적 접점이나, 모바일에 구현된 디지털 기술과 디자인은 첫 접점으로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나는 이것을 경험의 ‘퍼스트 터치 효과First Touch Effect’라 부르는데, 이 첫 접점의 경험이 디지털 소외 계층의 사회 참여 의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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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반 사회에서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은 시각장애인에게 공공 또는 기업 브랜드를 만나는 첫 접점이다. 이 접점은 시각장애인들의 지속적 사회 참여 의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ㅣ출처 :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1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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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모두’를 위할 것인가?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은 “모두를 위한 경험”을 의미한다. 이를 공공에 접목해본다면 행정 서비스, 대중 교통, 교육, 문화예술, 응급 상황 신고 등 생활 속 편의가 누구에게나 제공되고, 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미술관의 경험을 예로 들어봤을 때, 전시를 예매하고 집 밖을 나와 미술관에 도착해 전시를 감상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밖으로 나가길 주저하겠는가? 누구나 나오는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장애 유무와 관계 없이 말이다.
포용적 기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정 중심의 노력이 필요하다.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디지털 취약 계층 사용자를 ‘상상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직접 ‘참여하여’ 테스트하고 피드백을 주고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용자 중심 디자인 또는 사용자 중심 기술을 구현 가능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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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미션잇 대표로, 장애인과 고연령층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용자 경험에 대해 연구한다. 2021년부터 장애인 관찰 조사와 전문가 인터뷰에 기반한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 장애인 이동, 발달장애 아동의 놀이, 개발도상국 안전, 시니어의 디지털 접근성 등과 같은 현대 사회 이슈를 디자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런던에서 사회적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을 공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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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미션잇은 장애인, 고연령층 등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용자 경험을 연구하는 디자인·콘텐츠 기업으로, 포용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위한 깊이 있는 전략을 만듭니다. MSV는 Meet Social Value의 약자로 콘텐츠의 선한 영향력을 지향하는 미션잇의 브랜드입니다. MSV 뉴스레터는 포용적 사회를 지향하는 2,000명이 넘는 독자분들이 구독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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