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Trauma. 누구나 꺼내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존재한다. 트라우마 Trauma. 누구나 꺼내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존재한다. 트라우마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왔는데 “상처" 또는 “부상”을 의미한다. 신체적 상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던 단어지만 현대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정신적 상처”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청장년은 평균 4.8개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89.9%가 일생 동안 적어도 1개 이상의 트라우마를 경험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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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재난, 상처 등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겪는 것은 개인의 정신 건강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장기적인 심리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가 그렇다. 반복적으로 사건이 떠오르기도 하고, 기분이 부정적으로 변하거나 과민 반응, 각성 등의 상태가 일어나기도 한다. 삶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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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디자인은 이런 트라우마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겪은 트라우마로부터 회복을 위해 공간과 환경을 디자인하는 접근 방식을 트라우마 기반 디자인Trauma informed design이라 부른다. 사실 이 단어 자체가 생소한 말이다. 국내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은 주제인데, 보통은 공간과 연결된다.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조명,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색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음악 등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회복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공간 내에 마련한다. 심리적 치유를 위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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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간 외에도 이런 트라우마 기반 디자인이 적용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앱 서비스에서는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 당장 떠올리기는 어렵다. 그런데 <재난을 위한 디자인 : 트라우마 기반 제품 개발에서 얻은 다섯가지 교훈> 이라는 아티클에서 나는 상당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Airbnb가 세운 비영리재단인 Airbnb.org의 경험디자인 리드 역할을 맡고 있었던 애니 우Annie Wu가 팬데믹 기간 의료 종사자들을 고려한 에어비앤비 앱 개선 사례를 기반으로 작성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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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bnb에 아티클을 작성한 애니와 2주 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는 MSV<집중력>호 에 수록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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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과부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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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의료 종사자들은 현장에서 매일 사망을 목격하며 정서적인 소진을 겪었다. 심지어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호흡기 제공 부족으로 누가 인공호흡기를 우선적으로 받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최악의 도덕적 위험에도 놓여있었다. 마치 침몰해가는 배에서 몇 안 남은 구명조끼를 두고 누구를 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시기에 에어비앤비는 지쳐있는 의료 종사자들을 위해 2020년 3월 프론트라인 스테이Frontline Stays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의료 종사자들이 병원에서 경험하고 있는 강도 높은 업무 중 인근에서 무료로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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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의료진들의 과부화 상태였다. 의료진들은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12시간 근무를 마치고 난 뒤 머물 수 있는 숙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기존에 에어비엔비처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숙소를 예약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또한 호스트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다. 혹시라도 코로나에 감염된 의료진이 집 안에 머물게 됐을 때 호스트 가족의 건강, 그리고 무료로 숙박을 제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손실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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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관련 의료 종사자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무료로 제공할 호스트를 모집하고, 의료진들에게 쉼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에어비앤비의 프론트라인 스테이 프로그램. 현재는 종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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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 특히 의료 시설에서 잠시 벗어났다가 복귀해야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주거 결정을 내려야하는 사람들의 경우 어떤 형태의 '지시'나 '압박'에 대해 민감할 수 있다. 따라서 앱 서비스는 그들에게 어떤 결정을 ‘강요' 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설계됐다. 강제로 어떤 것을 하거나 한 방향으로 강하게 유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에어비엔비에서는 사용자가 환경을 전체적으로 제어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아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리뷰 과정도 그렇다. 최근에는 웬만한 어플리케이션 서비스에서 건너 뛰기Step this step 버튼을 당연하게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거의 최초로 시도된 것이었다. 사용자는 머물고 있던 숙소에 대한 평가를 건너 뛸 수 있다.또는 Save&Exit 처럼 필요할 때마다 이 과정으로 돌아올 수 있는 옵션을 제공했다. 전적으로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줌으로써 사용자의 현재 상태를 존중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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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로서 사용하는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한다. 단어는 중요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휠체어에 속박된", "휠체어에 구속된"이라고 말하는 것은 "휠체어 사용자"나 "휠체어 탑승자"라고 부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킴 닐슨 <장애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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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발견하고 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서비스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 “장애인을 고려한 디자인"은 미묘한 차이지만 의미는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위한다'는 것은 은연 중 시혜적이거나 일방적인 도움을 담는다. 그러나 고려한다는 것은 조금 더 포괄적으로 '함께' 생각한다는 의미다.
에어비앤비에서는 이처럼 단어가 주는 의미를 중시하여 '리뷰Review'를 '피드백Feedback'으로 바꿨다. 리뷰는 보통 제품과 서비스를 ‘평가'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프론트라인 스테이에 참여한 의료진들은 대부분 무료로 숙박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에 기꺼이 무료로 제공해준 숙소를 평가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머무는 경험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다음에는 무엇이 나아질 수 있을까?’ 에 초첨을 맞춰 더 개방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모색할 수 있는 '피드백'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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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 멋진 에니메이션과 이모지를 활용하여 페이지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약간의 화려한 요소들이 분명 디자인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긴시간 근무하며 중증 환자들을 돌본 의료진들에게 화려한 애니메이션과 상세한 소개, 아이콘 등은 오히려 부담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핵심정보만 간략하게 나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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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일러스트와 함께 화면 속 요소들이 넓게 퍼져있다. 우측은 체크표시와 함께 필요한 정보만 간략하게 리스트 형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좌측이 나름대로 더 세련되게 보일 수 있지만 우측의 간결한 리스트 형식은 오히려 더 빠르게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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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가 현재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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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서비스에서 실행 시 작동으로 적용되는 '디폴트 설정'이 있다. 이러한 설정은 사용자가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특정 서비스에 참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회원 가입을 하다가 관련 소식을 받겠다는 체크박스를 클릭했는데, 서비스 이벤트부터 해서 업그레이드 소식, 최근 동향 등 과잉 정보까지 이메일로 받게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편리할 때도 있다. 애니가 예시로 든 음악 청취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에서는 사용자의 청취 기록과 선호도를 분석하여 맞춤형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준다. 또 세금 공제 서비스인 터보택스TurboTax는 이전에 사용한 정보를 자동으로 활용하여 세금 공제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한다.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이렇게 자동으로 설정을 해주는 것이 만족감을 올리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프론트라인 스테이를 제공하는 호스트들의 심리 상태를 깊이 고려했을 때 이런 자동 설정도 '강요'나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자기 가족의 안전과 금전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집의 일부를 내놓는 호스트의 상황은 임대료를 받고 공간을 제공하는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를 도울 것인가?" 에 대한 선호도 체크에도 전적으로 호스트의 생각을 담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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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는 당신이 제공하는 장소에 누가 신청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에 대한 질문에 제안Suggested이라는 단어와 함께 기본적으로 모든 유형의 그룹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측에서는 누구를 돕고 싶습니까? 라는 약간의 다른 질문과 함께, 자신이 돕고 싶은 사람을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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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는 특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디자인은 사용자가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각자의 필요에 맞는 개인화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권과 통제감은 심리적 안정을 위한 디자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다. '사용자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모든 디자인은 사용자를 중심에 두고 그들의 심리적 안정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사용자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필요한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디자인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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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수 미션잇 대표
변화를 만드는 디자이너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디자인의 가치는 심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사고의 툴이라고 믿는다. 2021년부터 장애인 관찰 조사와 전문가 인터뷰에 기반한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 장애인 이동, 발달장애 아동의 놀이, 개발도상국 안전, 시니어의 디지털 접근성 등과 같은 현대 사회 이슈를 디자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런던에서 사회적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을 공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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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미션잇은 장애인, 고연령층 등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용자 경험을 연구하는 디자인·콘텐츠 기업으로, 포용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위한 깊이 있는 전략을 만듭니다. MSV는 Meet Social Value의 약자로 콘텐츠의 선한 영향력을 지향하는 미션잇의 브랜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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