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경계가 없는' 디자인이다. 차별을 특별히 강조하거나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 아모스 렉스(Amos Rex), 쿨투후셋(Kulturhuset), 모데르나 뮤젯(Moderna Museet).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약 2주 동안 북유럽의 뮤지엄과 도서관이 어떻게 포용적인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탐구하기 위해 핀란드 헬싱키와 스웨덴 스톡홀름 내 열여섯 곳의 뮤지엄과 도서관을 방문했습니다.
대표적 복지국가에 걸맞게 사회 운영의 기본 원리에 평등과 포용이라는 가치가 잘 반영된 나라. 2025년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핀란드는 8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고, 북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상위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번 탐방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를 시리즈로 정리해 독자 여러분께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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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해외 연수는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아름다운가게 뷰티풀펠로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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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하는 디자인. 우리는 오랜기간 차별에 초점을 맞춰 많은 이야기를 해 왔다. 그만큼 차별의 역사는 아픈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까.
북유럽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경계가 없는' 디자인이다. 차별을 특별히 강조하거나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어린이와 어른, 외국인과 내국인, 휠체어 이용자 혹은 시각장애인의 구분 자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점은 이런 구분이 실제 공간 경험에서는 장벽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데 있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등한 경험이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감상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조건 안에서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뮤지엄은 어떻게 방문객들에게 최대한 동등한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이러한 가능성을 어떻게 공간과 디자인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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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디자인 뮤지엄 입구. 휠체어 이용자, 유아차 동반자, 짐 수레를 끄는 사람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접근가능한 출입구에 대해 안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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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토그램과 아이콘 같은 시각 기호는 단순히 그래픽적인 산물이 아니다. 언어처럼 사회적 합의와 관습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고, 사람들이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만들어낸 문화적 약속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 주차구역이나 장애인 화장실에 붙은 휠체어 아이콘은 모양 자체가 장애를 본질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호가 그 사회에서 장애인을 위한 공간을 나타낸다고 합의되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읽히는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 기호학자 찰스 샌더스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는 기호가 의미를 갖게 되는 방식을 설명하며, 기호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여러 형태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어떤 기호는 대상을 닮아 있기 때문에 이해되고, 또 어떤 기호는 대상과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있기 때문에 의미를 얻는다. 그리고 닮음도, 직접적 연결도 없지만,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사용해 온 관습과 약속 덕분에 의미가 성립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픽토그램이나 아이콘은 언뜻 보기에는 대상을 닮은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상황과 장소에 반복적으로 붙여지며 의미가 굳어진다. 문화적 약속에 의해 성립하는 상징에 가까운 것이다. 즉, 기호를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만들어 온 문화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한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들이 쓰는 그래픽 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이런 세계관은 휠체어 이용자, 유아차 동반자, 그리고 때로는 자전거 이용자를 나타내는 아이콘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아이콘들은 항상 함께 쓰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서는 휠체어 아이콘은 흔히 보지만 여러 아이콘을 하나의 층위에서 묶어 제시하는 방식은 드물다. 한국에서는 대개 ‘교통약자 우선석’처럼 특정한 상황의 안내가 필요한 공간에서만 몇 가지 아이콘이 함께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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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헬싱키 시내 카페에서 화장실을 안내하는 아이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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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아이콘을 보자. 화장실 문 앞에 휠체어와 유아차 아이콘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면 “장애인 화장실인 동시에 내부에 기저귀 교환대가 있으니 영유아 동반자도 자연스럽게 함께 사용하라”는 의미다. 출입문이나 통로에서 세 아이콘(휠체어·유아차·자전거)이 함께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이 곳은 바퀴를 주요 이동 수단으로 삼는 사용자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아이콘들이 사용자의 특성(장애·육아·자전거 이용)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같은 설계로부터 혜택을 얻는 사용자군’이라는 관점에서 묶인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이나 영유아 동반자를 특별한 예외 집단으로 분리하지 않고, 상황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묶는다. 이는 누구를 특별히 고려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환경이 여러 사람에게 함께 편리한가를 묻는 접근에 가깝다. 이러한 시선에는 장애를 개인의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조건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배어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이 아이콘에 드러난다.
몇 년전 MSV 직업Job호를 만들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국가별로 조사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은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등록된 사람을 의미한다. 즉, 법이 정한 15개 장애유형 기준을 충족하고, 의학적 진단과 판정 절차를 거쳐야 공식 통계에 포함된다. 그래서 한국의 장애 통계는 어디까지나 등록된 장애인 수를 기준으로 하며, 실제 생활에서 기능적 제약을 경험하지만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은 통계 밖에 남는다.
반면 스웨덴과 핀란드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내가 핀란드 통계청과 몇몇 전문가에게 물어봤을 때 “장애인 인구를 공식적으로 수집할 수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핀란드에 장애인 고용에 대한 공식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분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특정 형태의 재정 지원을 받는 사람들이나 의료 지원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는 존재하므로 이를 통해 장애 인구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 미코 니에미, 핀란드 통계청,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2 <직업> 중
"핀란드에서 장애에 대한 기준은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한 능력 Ability to Function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아노 카필라, 헬싱키 대학교 연구원,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2 <직업> 중
두 나라는 ‘장애’를 특정 집단으로 고정해 등록하고 분리하기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를 중심으로 본다. 이는 WHO의 ICF(국제기능·장애·건강 분류)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ICF는 장애를 개인의 손상만으로 규정하지 않고, 신체 기능·활동 능력·사회적 참여, 그리고 이를 둘러싼 환경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즉, 장애는 특정 개인의 속성이라기보다 환경과 기능의 조합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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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자연사 박물관 들어가는 입구에 표시된 아이콘. 유아차, 휠체어 이용자, 자전거가 함께 이용하면 된다고 안내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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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의 차이는 내가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발견한 아이콘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휠체어 이용자, 유아차를 끄는 사람, 자전거 이용자가 하나의 표기 안에 자연스럽게 묶여 있는 이유는, 이들을 각기 다른 집단이 아니라 같은 설계로부터 이득을 보는 사용자들로 보기 때문이다. 장애를 분리하거나 예외화하지 않고, 환경을 디자인해 여러 사용자군이 동시에 편리해지는 조건을 만드는 접근이 아이콘 자체에 스며 있다.
이런 아이콘 디자인은 어떤 사람들을 ‘특별한 대상’으로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관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설계자가 접근성을 고려한 디자인을 별도의 추가적 노력으로 인식한다면 이미 마음속에 장애인, 혹은 이동 약자에 대한 경계가 그어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아이콘에서부터 생각해본다면 접근성을 고려하는 것이 별도의 옵션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된다. 장애가 있거나 유아차를 끄는 사람,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 짐이 많은 사람 모두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용자라는 점을 떠올리면 접근성 설계는 특정 집단에게만 해당되는 요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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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I 김병수 미션잇 대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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