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방문한다면 작품 앞에 동그랗게 앉아 도슨트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날만큼은 아이들에게 교실은 미술관이기에, 어른들은 조금 소란스럽거나 이동에 불편이 있어도 기꺼이 공간을 양보하고 소음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함께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움직임도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어우러지는 이 공간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미술관임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과연 이곳은 어떻게 누구나 환영받는 공간이 될 수 있었을까. 장애나 언어, 나이,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두가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미션잇 멤버들과 함께 ‘포용적 미술관’과 관련된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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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부모님과 함께 활동지를 열심히 채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임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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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시물, 두 가지 경험 :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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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ㅣ런던 트랜스포트 뮤지엄은 저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공간이에요.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장소’로도 꼽힐 만큼 공간 전반이 어린이 친화적으로 구성되어 있었죠. 옛날 런던 버스의 내부를 재현해두고, 아이들이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놀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어요.
당시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런던 대중교통 홍보 포스터를 모아 전시했던 기획 전시에 갔었어요. 성인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춰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는 바로 아래쪽에 아직 걷지 못하는 유아부터 막 걷기 시작한 아이들을 위한 전용 공간이 따로 마련해 뒀더라고요. 포스터를 퍼즐 형태로 재구성해 아이들이 아래에 앉아 퍼즐을 맞추거나, 회전식 블록을 돌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죠.
그때 아이가 돌이 막 지났는데, 그런 아이에게도 전시가 열려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반가웠어요. 아이는 자기 눈높이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어른들은 아이를 돌보며 전시를 관람할 수 있으니 아이와 함께하는 박물관 방문이 더 이상 힘들거나 피곤한 일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아이와 어른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감상하고 소통할 수 있는 박물관. 이런 모습이 포용을 실천하고 있는 박물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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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한 런던 트랜스포트 뮤지엄, 옛날 런던 버스에 자유롭게 올라 타볼 수 있다 ©전예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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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ㅣ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독일 비스바덴에 있는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전시장 안에서 아이들이 바닥에 투사된 영상물을 보며 각자 활동지를 들고 친구들과 함께 전시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자연을 주제로 한 상설 전시였는데, 영상 콘텐츠와 연계된 체험형 학습이 아이들에게 제공되고 있었고 어른들은 여유롭게 전시를 차근차근 감상하고 있었죠.
같은 전시 공간 안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를 경험하고 있어서 인상 깊었어요. 서로 다른 리듬으로 전시를 즐기고 있었지만, 서로가 방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시의 폭을 더 넓혀주는 듯했어요. 이렇게 하나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과 방식으로 전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된다면 미술관이 연령에 상관없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부모와 아이, 혹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 전시를 즐길 수 있는 이런 경험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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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스바덴 뮤지엄에서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 뮤지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임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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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ㅣ최근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전시에 다녀왔어요. 감각적 다양성을 전시 감상의 중심에 두고 관람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요.
특히 눈에 띄었던 건, 작품 설명이 ‘대화’ 형식으로 제공된다는 점이었어요.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한 사람이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의 두 사람이 작품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형식의 오디오 해설이 들려요. 시각장애가 있는 관람자와 비장애인 디자이너가 서로의 시선으로 작품을 해석하거나, 비장애인 관람객 각자가 느낀 점을 주고받는 식이에요.
단순히 작품의 외형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지 등 감상의 방향까지 함께 제시한다는 점이 정말 좋았어요. 쉬운 말과 실감 나는 표현으로 누구나 작품을 자신만의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고요. 실제로 이 전시에 사용된 해설에는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도 직접 담겨있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을 해석하는 주체로서 당사자의 시선이 담기니 훨씬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고, 감상 경험도 훨씬 풍부해졌어요. 감각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것을 전시 언어로 자연스럽게 끌어안는 방식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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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대화하는 방식의 작품 설명은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에게 또 다른 생각거리를 준다. ©백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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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ㅣ유도블록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어요. 대부분의 전시장에는 입구까지만 유도블록이 설치되어 있고, 내부 공간까지는 연결되어 있지 않거든요. 시각장애인 관람객 입장에서는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예전에 일본의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나, 핀란드 헬싱키의 오디 도서관(Oodi Library) 사례를 인터뷰하면서 흥미로운 접근을 본 적이 있어요. 실내 유도 블록이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얇은 메탈 라인으로 대체되어 있었는데 시각장애인분들은 이 재질감의 차이만으로도 이동 경로를 인지할 수 있더라고요. 감각의 민감도를 고려한 실용적인 배려였죠. 공간의 미적 완성도도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접근성과 이동권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인데, 아직 국내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는 것 같아요. 입구까지만 닿는 디자인이 아니라, 전시장 전체를 아우르는 실질적인 포용적 전시 디자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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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도 시각장애인 이동을 위한 안내가 되어 있는 교토 교세라 미술관, 참고로 핀란드 오디 도서관은 도서관 실내 전반에 걸쳐 얇은 메탈 라인이 깔려있다. ©김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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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ㅣ최근 시립미술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관찰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전맹 시각장애인 분이 전시장 앞까지는 유도블록을 따라 잘 이동하셨는데, 전시장 내부에 들어서자 지팡이를 꺼내셨죠.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지팡이를 넣으시더라고요. 작품을 훼손하거나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이 들어서 그랬다고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전시장 내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이 계신 만큼, 조금 더 포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감을 해치기 때문에 꺼려진다면 미감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 방법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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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에서는 작품 앞까지 유도블럭이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 작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포용적 전시 디자인은 다양한 감각을 고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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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ㅣ각자가 편한 감각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접근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을 관람했던 때가 기억나네요. 관람객이 원하는 전시물을 선택하면, 촉각 패드에 그 배 모형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어 시각장애인분들도 손끝으로 형태와 구조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어요.
또한 후각을 활용한 전시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신안선 출수 당시 발견된 후추와 계피 같은 향신료를 직접 맡아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당시 상황을 상상하며 체험할 수 있었어요. 이처럼 시각뿐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통해 전시를 즐겨서 그랬는지 더욱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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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신안선의 모습을 촉각 패드로 느껴볼 수 있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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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ㅣ영국 런던 외곽에 있는 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성의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공간이 있었어요. 부엌에 들어가니 당시 사용하던 허브 향과 고기 굽는 냄새가 퍼져 공간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졌죠. 거기에 사람들이 일하는 소리도 들리고, 프로젝터로 옛날 요리하는 모습도 보여줘서 재미뿐만 아니라 약간의 감동도 함께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친구가 추천해 준 브리스톨 해양 박물관 사례도 생각나네요. 실제 모형으로 선박 내부를 구현한 공간에서는 선원들이 코 고는 소리와 발 냄새까지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오감을 모두 활용한 전시라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전시를 즐길 수 있게 한다면, 정말 ‘모두가 함께 즐기는 전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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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다양한 관람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경험과 필요를 반영하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더욱 열린 공간으로 진화해야 한다. 물리적인 접근성은 물론 감각의 차이, 연령, 문화적 배경까지 세심하게 아우르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누구를 위한 전시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접근법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대상에 맞춰 전시를 분리하기보다는, 하나의 전시를 다양한 감각을 통해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포용적 뮤지엄의 핵심이다.
전시는 하나지만, 그 전시를 경험하는 방식은 다양해야 한다.
미술관이 누구나 편안히 머무를 수 있고, 자신만의 감동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예술을 통해 깊이 연결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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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있는 바세나르 볼린덴 현대 미술관에서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 작품을 구경하는 모습이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감각이든, 다양한 관람 형태가 존재하는 미술관이 포용적 미술관, '모두의 미술관'의 본질이다. ©임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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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ㅣ임슬기, 미션잇 콘텐츠 에디터
참여ㅣ김병수, 미션잇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예진, 미션잇 디자인 디렉터
박예지, 미션잇 UX 리서쳐 백경하, 미션잇 리서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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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미션잇은 장애인, 고연령층 등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용자 경험을 연구하는 디자인·콘텐츠 기업으로, 포용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위한 깊이 있는 전략을 만듭니다. MSV는 Meet Social Value의 약자로 콘텐츠의 선한 영향력을 지향하는 미션잇의 브랜드입니다. MSV 뉴스레터는 포용적 사회를 지향하는 2,000명이 넘는 독자분들이 구독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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